25페이지
가을 유서 / 류시화 본문
가을엔 유서를 쓰리라
낙엽되어버린 내 시작 노트 위에
마지막 눈 감은 새의 흰
눈꺼풀 위에
혼이 빠져 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
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
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
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
하룻밤새 하얗게 돌아서버린 양치식물 위에
나 유서를 쓰리라
파종된 채 아직 땅 속에 묻혀 있는
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
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바닷게의
고독한 시체 위에
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
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
가장 먼 곳에서
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
내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
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껍질 위에
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
살아 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
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
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
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
이불을 덮어 주고
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
소리내어 읽으리라
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
무더위의 끝을 다 헤아릴 틈도 없이 가을이다
'[ Mon Hobby ] > Poem' 카테고리의 다른 글
비는 소리가 없다 / 김수열 (0) | 2016.08.31 |
---|---|
언덕 / 김광균 (0) | 2016.08.31 |
기도 /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(0) | 2016.08.29 |
生年不滿百 / 古詩&김삿갓 (0) | 2016.07.30 |
누구든 떠나갈 때는 / 류시화 (0) | 2016.07.30 |
Comments